눈 치우는 사람들

오전 과업을 마치고 나오니 눈이 펑펑 내린다. 높으신 분 눈 밟고 미끄러질까 인부들은 줄곧 눈을 쓸었다. 빗자루, 너까래부터 각종 기계들까지 등장했다.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 인부들은 밥때도 잊은듯 열심히 눈을 치웠다. 돌아가는 기계 소리가 요란했다.


점심자리에서 소주를 몇잔 마셨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고 몇가지 조언을 얻은 뒤 즐겁게 술을 마셨다. 오후 마감이 남았지만 언제 그런거 신경쓰고 술을 마셨나. 포슬하니 눈도 내리겠다 분위기 타고 우리는 즐겁게 마셨다.


식사 후 돌아오는 길 거리의 눈은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 마침 내리던 눈도 그쳐 그곳은 마치 눈이 내리지 않은 곳처럼 보였다. 인부들은 늦은 점심을 하러 갔을까? 아니면 혹시 눈이 또다시 내리진 않을까 멀리 숨어 노심초사하고 있을까? 우리는 알 수 없었다.


세상 살다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을 해야할 때가 있다. 성인 남성이라면 대부분 군대에서 그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 내 경우 폭우 속에서 흙을 파 배수로를 내라는 지시를 받은 적이 있었다. 4시간 동안 배수로를 팠지만 결국 실패했다. 지금도 왜 그 일을 시켰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장군들의 사열을 위해 부대 내 군용차 바퀴에 구두약을 전부 바르라는 지시도 받았다. 군용차를 운동장에 세워놓은 뒤 흙묻은 바퀴가 시커멓게 보이도록 구두약을 발랐다. 중대장이 단상 위에 올라가더니 군용차 오와 열이 맞지 않는다고 했다. 군용차를 전부 옆으로 조금씩 이동시킨 뒤 다시 처음부터 구두약을 발랐다.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하게되는 것이 더이상 괴롭거나 짜증나진 않는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똑같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찾아오지 않는다는 건 안타깝다. 누구는 보쌈에 소주를 곁들이며 즐겁게 식사를 하는 동안 누구는 거리에 쌓인 눈을 흔적없이 치워야 하는 일을 한다.


그게 인생살이고 세상이라기엔 너무나 안타깝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다만 조금 더 밝은 세상을 만들어야겠다는생각은 든다. 그들이 잊혀지지 않는다.



어떤 기사를 써야할까?

기자라는 직업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이런 고민을 하진 않았다. 기자 초년병 시절에는 쓰기 급급했다. 글쓰는 직업을 갖게 됐다는 기쁨도 잠시, 기계적으로 보도자료를 처리하는 게 내 일이었다. 그렇게 자료만 쓴 지 몇개월이 지나자 스트레이트 기사를 제대로 쓸 수 있게 됐다.


"훌륭한 기자는 1단짜리 기사를 잘쓰는 기자"라는 말을 어디서 듣고 단신 기사에 빠졌다. 짧고 굵은 기사를 쓰겠다며 단순한 내용을 썼다. 그러다보니 일을 게을리 한다는 오해를 샀다. 지면에 들어가는 비중이 적어서 그랬을 것이다.


그 뒤로는 한동안 방황했다. 긴 호흡으로 기획 기사를 쓰다가 시리즈 기사를 썼고 1스트 2박스 공식에 따라 박스 공장도 다녀봤다. 다행히 쓰고싶은대로 다양한 기사를 써볼 수 있었다.


그러다 출입처 생활이 점점 익숙해지자 모든 게 무료해졌다. 기사를 써도 재미가 없고 매번 취재할 때마다 큰 어려움도 없어 모든 게 재미없어졌다. 그렇게 나는 [단독]의 늪에 빠졌다. '남들이 쓰지 않는 기사를 써야 진정한 기자'라는 인식에 편법도 서슴지 않게 됐다. 그렇게 쓴 기사들 중 일부는 훌륭했지만 대부분 한두시간 후 잊혀졌다.


시간이 꽤 흘러 문득 내세우기 위한 기사가 아닌 세상에 도움이 되는 기사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걸리면 그냥 써버리는 버릇을 고치는데 참 오래 걸렸다.


뉴욕타임스 크라임을 읽고 난 뒤 든 생각은 '기사가 참 재밌다' 였다. 기사를 이렇게도 쓸 수 있구나. 기사를 읽고 재미있다는 생각이 든건 참 오랫만이었다. 


기타리스트 김태원은 왜 예능에 출연했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내 자식같은 곡들이 빛을 보지도 못한채 죽어나가는 모습이 너무 가슴아팠다"


나혼자 만족한다고 좋은 기사가 되는 것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사회 거악을 폭로하는 대단한 기사를 썼어도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다면 절대 좋은 기사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을 한다. 독자들이 내 기사를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건 현대 기자들의 필수 덕목이다.



할머니와 세뱃돈

서른 넘어 할머니께 세뱃돈을 받는 일은 흔치 않을 것이다. 사회생활을 시작한지 몇년이 지나도록 돈한푼 쥐어드린 적 없는 손자에게 할머니는 이번 명절에도 선뜻 봉투를 내미셨다.


봉투를 받지 않겠다고 하는 말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지난 10여년의 경험으로 잘 안다. 할머니께서 세뱃돈을 건네는 이유는 특별하지 않다. 지금껏 그래 왔으니까.


특별하지 않게 사랑하는 모습을 할머니를 통해 배웠다. 어린 시절 할머니와 지낸 시간이 참 많았다. 할머니는 언제나 그 자리에 계셨다. 내가 배고프면 밥을 해주셨고 심심해 하면 놀아주셨다. 할머니와 나란히 앉아 다리를 두들기며 놀았던 건 마치 엊그제 같다.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명료한 이유는 그가 지금도 예전과 같은 생각과 행동을 견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대가없는 사랑. 그리고 일방적인 사랑 말이다.


지금도 할머니는 몸이 아파 거동이 불편한데도 우리가 찾아가면 항상 대문 앞까지 마중을 나오신다. 떠날때 몇번이고 나오지 마시라 해야 한껏 아쉬운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신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여도 마중과 배웅은 귀찮아질 수 있는데 할머니께는 그런 게 없다.


성인이 돼 세상에 나온 뒤로 할머니처럼 사랑하고 싶었다. 알게 모르게 돕고 항상 그 자리에 있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사랑하기엔 나에게 할머니와 같은 마음이 없었다. 각박한 현대사회와 조급해진 마음 때문이라고 변명해 본다. 고향을 떠나지 않고 할머니와 더 오랜 시간을 보냈다면 나는 조금 더 성숙한 모습이었을까.


성경은 구제에 있어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다. 정말 어려운 말이다. 누구든지 내가 사랑한 만큼 사랑받길 원하고 내가 잘해준 만큼 대접받길 원한다. 보상을 위해 우리는 생색을 내고 작은 일을 크게 부풀린다.


짧은 연휴를 마치고 할머니댁을 떠나는 날 지붕을 올려다 봤다. 기왓장이 깨지고 떨어져 있었다. 어린 시절 기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변해가는 내 모습과 낡아가는 할머니댁 모습 속에서 할머니의 사랑만큼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였다.



새우잠과 고래의 꿈

지금도 왜 그랬나 싶지만, 특별한 이유도 없이 멋진 꿈을 꾸던 적이 있었다. 


몇년 전, 꿈이 뭐냐고 물어보면 꿈을 이루는 게 꿈이라고 답했다. 꿈만 꾼건 아니고 나름 준비를 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오전 9시에 도서관에 들어가 저녁 9시에 나왔다. 도서관에 앉아 멀리 도심 스카이라인 뒤로 해가 넘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언젠가 꿈을 이뤄 이곳에서 나갈 거라고, 끊임없이 자신을 다독이며 응원했다. 


특별히 뭔가 정해놓고 공부한 건 아니었다. 직장도 있었고 따야할 자격증도, 어학점수도 없었다. 그냥 앉아서 독일어를 공부했고 그러다 질리면 영어를 공부했다. 그것도 질리면 패션을 공부했고 질리면 다시 독일어를 공부했다. 주말마다 그러고 앉아있으니 뭔가 되는 것 같으면서도 되는 건 하나도 없었다. 머릿속에 든건 많아지는데 일상생활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느낌이었다. 생각해보니 그때 내 꿈은 이 모든 걸 다 잘해야 하는 것이었다. 


독일에 가서 외국계 기업에 다니며 부업으로 패션 사진을 찍는 것. 내 기준에서 지금 생각해도 멋진 꿈이다.


그런 생활은 어느 순간 끝났다. 일이 바빠져서도 아니고 일신상의 변화 때문도 아니었다. 문득 어느 순간 그러지 않게 됐다. 일본 여행 때였나... 한참 길을 걷던 중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피곤할 수는 있지만 그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외국 여행을 가면 한 장면이라도 더 보기 위해 발이 부르트도록 돌아다니던 나였는데 한낮에 피곤함을 느끼다니. 내 안에 나를 움직이던 뭔가가 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후 자신감이 사라졌고 현재에 충실해야 한다는 비겁한 변명으로 일관하며 주말에 그냥 쉬었다. 책장에 꽂힌 독일어 교재 위에는 먼지가 앉았고 카메라는 사둔 필름이 어디있는지 모를 정도로 잊혀졌다. 


그렇게 1년 넘는 시간을 보내는 동안 억지로 잘 살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꿈을 접은 대신 현실에서 성과를 거두면 된다고. 어차피 예전에 공부하던 걸로 그 꿈을 이루긴 현실적으로 어려웠을 거라고. 나름의 성과는 거뒀다. 지금처럼 살고 있으니까.


계속 똑같은 얘기만 한다고 느낀 건 얼마 전이었다. 새로운 경험을 한 뒤 그걸 공유하는 게 취미였는데 어느 순간 나는 먹고 자고 쉬고 일하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고작 한다는 이야기가 "나 누구누구 알아", "그 기사 나도 봤어", "내가 이런걸 썼어 한번 봐봐" 따위였다. 그렇게 하루를 살고 하루에 만족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 삶의 회의감이 강하게 밀려올 때 우연찮게도 강래우씨의 홈페이지가 생각났다. 거기에 들어가 몇시간을 구경했다. 이어 최창수PD의 책을 읽었고 양승우 작가의 책을 읽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뭐가 됐든간에 끝까지 멈춤없이 달렸다는 것이다. 지금 이걸 열심히 해서 뭐가 될까는 생각하지 않았다. 옆에 있는 사람 이기기 위해, 남들 앞에 내세우기 위해 살고있는 내 모습과는 달랐다. 월터 미티가 된 기분이었다. 여러 군데서 나보고 좀 똑바로 살라 하고 있었다. 유튜브를 트니 한 힙합가수가 말했다. "새우잠을 자더라도 고래의 꿈을 꾸세요."


우왕좌왕 하다보니 어느덧 서른살이 저물어 간다. 몇살 까진 뭐하고 몇살 까진 뭐해야지, 라는 말을 더이상 할 수 없게 됐다. 젠장 이런 날이 올 줄이야. 이런 게 후회인가. 이제는 내일 당장 시작해도 목표를 달성할 자신이 없고 내일 당장 시작할 자신마저 없다. 그래도 내 안에 나를 움직였던 힘을 다시 찾았다 생각하고 열심히 살아봐야겠다. 


네이비실을 전역하고 하버드 의대를 졸업 후 NASA 우주비행사가 된 조니김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순간 스스로를 죽이는 것"이라고 했다. 나만의 인생을 사는데 누구보다 뛰어나고 말고 할 것도 없다. 잘 살자. 후회없이



2020년 12월31일에

12월31일. 또 한 해가 지났다. 다사다난이라기 보단 지난했던 한 해였다. 전염병으로 삶이 멈췄고 각자의 꿈은 제자리에 누웠다. 잠깐 멈췄다 간다기엔 마음이 너무 아프다.


사랑니를 뽑았다. 유난스럽게 자란 덕에 뽑고 나서도 몇주간 치과를 다녔다. 치과 의자에 앉으면 치위생사가 엑스레이 사진을 모니터에 띄운다. 모니터 왼쪽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정현 29Y 5M. 29년 5개월산(産)이라는 뜻이다.


몇몇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그동안 타인의 나이 뒤에 숨었다. 조금 어린 나이에 사회생활을 시작한 탓에 나보다 나이 많은 이들이 동기, 후배가 됐다. 창피스럽게도 그런 상황에서 위안을 찾았다. 아직은 여유가 있다고, 실패하더라도 재도전할 기회가 남아있다는 치졸한 생각이었다.


얼마전 입사한 수습기자들의 자기소개를 읽었다. 나보다 나이많은 수습기자는 더이상 없었다. 내면의 방패가 사라졌다. 아무리 후회해도 더이상 만회할 수 없다는 생각이 마음을 정통으로 강타했다. 이제 물러설 곳이 없구나. 남들보다 더 많은 기회를 받았음에도 이 정도밖에 못했구나. 자책감이 들었다. 결국 도망친 곳에 천국은 없었다.


막다른 곳에 서서 되돌아본 2020년은 참 애틋했다. 한국 나이로 서른이 돼 건강관리 한답시고 동네 수영장에 등록했지만 2주 만에 코로나로 흐지부지됐다. 수영복까지 샀는데! 수영은 어그러졌지만 등산도 하고 달리기도 하고 이런저런 운동을 계속했다. 하반기엔 헬스장을 열심히 다녔고 백패킹도 다녀왔다.


독서량은 예년에 비해 확 줄었다. 책을 가려 읽어 그런 것 같다. 인생이 더이상 돌이킬 수 없는 처지에 이르자 후회하지 않으려고 멍청한 짓을 했다. 곱절로 후회 중이다. 조지 버나드 쇼처럼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


2021년은 도전하는 해가 됐으면 좋겠다. 자신감이 바닥을 친다. 금새 적응할 줄 알았던 새 부서에선 반년 넘게 관심병사다. 이룬 것이 없어 보람과 긍지를 얻을 수 없었다. 새해에는 작은 것부터 하나씩 이뤄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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